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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제목도 줄거리도 전혀 몰랐습니다. 크리스 헴스워스가 나온다는 말 한 마디에 재생 버튼을 눌렀고, 보고 나서야 이게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숲속 별장, 좀비, 생존이라는 익숙한 조합 뒤에 전혀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는 영화, <캐빈 인 더 우즈>입니다.

공포 클리셰, 이번엔 일부러 쓴 겁니다
포스터만 보면 완전히 낚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외딴 숲속 별장, 다섯 명의 젊은 친구들, 지하실에서 발견한 수상한 물건. 여기까지는 어딘가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슬래셔 무비(Slasher Movie) 공식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슬래셔 무비란 살인마나 괴물이 등장해 주인공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방식의 서브 장르로, 1970~80년대부터 공포영화의 주류 문법으로 자리 잡은 형식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30분쯤 보다 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화면이 갑자기 전혀 다른 공간으로 넘어갑니다. 양복을 입은 직원들이 모니터 앞에 앉아 별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장면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는데, 알고 나니 앞에서 봤던 모든 장면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영화가 활용하는 핵심 장치가 바로 메타픽션(Metafiction)입니다. 메타픽션이란 이야기 안의 인물들이 자신이 어떤 구조 안에 놓여 있는지 점점 인식해 가거나, 혹은 관객이 그 구조를 먼저 알아채면서 이중으로 이야기를 읽게 되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공포영화의 문법 자체를 소재로 삼은 공포영화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게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라 장르에 대한 꽤 진지한 해부였다는 점입니다.
데이나가 지하실에서 오래된 일기장을 읽고 주문을 낭독하는 장면도, 실제로는 지하 시설 직원들이 그 행동을 유도한 결과였습니다. 직원들은 별장 곳곳에 설치된 장비를 통해 다섯 친구의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었고, 어떤 물건을 지하실에 놓을지까지 미리 결정해 뒀습니다. 겉으로는 우연처럼 보였던 일들이 전부 설계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 슬래셔 무비 문법을 그대로 따르는 척 시작하지만, 이중 구조로 전복시킨다
- 지하 시설 직원들이 별장 안 상황을 실시간으로 조율하고 있다
- 메타픽션 장치 덕분에 관객은 피해자와 설계자 두 시선을 동시에 따라가게 된다
메타 공포가 불편했던 이유, 그리고 재미있었던 이유
영화 중반에 직원들이 어떤 괴물이 선택될지 내기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쪽에서는 대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도망치고 있는데, 다른 쪽 화면에서는 그 결과를 두고 돈을 걸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잠깐 웃다가 곧바로 찜찜함을 느꼈는데, 그게 이 영화가 의도한 감각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 설정이 일종의 아치타입(Archetype) 비틀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치타입이란 여러 이야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인물 유형이나 서사 구조를 말합니다. 공포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순수한 생존자',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친구', '먼저 죽는 커플' 같은 역할이 전부 아치타입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다섯 친구 각각에게 이런 역할이 미리 배정되어 있었고, 심지어 그 역할에서 벗어나려 하면 약물을 통해 행동을 교정하기까지 합니다.
크리스 헴스워스가 연기한 커트는 사실 가장 영리한 캐릭터였는데, 시설 측에서 그의 판단력을 흐리는 약물을 투여했다는 설정이 나중에 드러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사실은 이랬습니다' 식의 정보가 후반부에 한꺼번에 나오면 피로하기 쉬운데, 이 영화는 초반부터 직원들 장면을 번갈아 보여줬기 때문에 관객이 정보를 조금씩 가져가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구성이 꽤 영리했습니다.
한 가지 솔직히 말하면, 후반부에 괴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장면은 조금 정신없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동시에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설정까지 더해지면서 스케일이 급격히 커지는데, 제 기준에서는 이 부분이 살짝 과했습니다. 그래도 그 직전까지 쌓아온 장르 비틀기의 재미는 충분히 값을 했다고 봅니다.
반전 결말이 남긴 것, 두 번 보고 싶은 이유
데이나와 마티가 지하 시설로 내려가면서 영화의 전체 그림이 드러납니다.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진행되던 의식(Ritual)이 실패로 끝나면, 오래전부터 잠들어 있던 거대한 존재들이 깨어나게 됩니다. 여기서 의식이란 특정한 방식으로 희생자를 정해진 순서대로 제거해야 하는 절차를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 절차가 마치 공포영화의 공식처럼 설계되어 있었다는 게 핵심입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 중 한 명을 희생하면 의식을 완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선택하는 대신, 둘 다 거부하기로 합니다. 그 선택으로 의식은 실패하고, 잠들어 있던 존재들이 깨어날 가능성을 막지 못한 채 영화는 끝납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이 결말이 처음엔 허탈하게 느껴졌는데, 조금 생각해 보니 오히려 이게 더 일관된 마무리였습니다.
공포영화에서 '생존자가 끝에 살아남는다'는 관습 자체를 영화 내내 비틀어 왔으니, 결말까지 그 공식을 따르지 않은 셈입니다. 이 영화는 드류 고다드 감독과 조스 웨던이 함께 각본을 썼는데, 출처: IMDb - The Cabin in the Woods 조스 웨던은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 시리즈로 장르 문법을 비트는 작업에 익숙한 인물입니다. 각본 단계부터 이런 결말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는 점이 나중에 알고 나니 더 납득이 됐습니다.
영화는 2009년에 완성됐지만 제작사 MGM의 재정 문제로 개봉이 미뤄졌고, 결국 2012년에야 극장에서 공개됐습니다. 그사이 크리스 헴스워스가 <토르>와 <어벤져스>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배우가 됐고, 그 덕분에 저처럼 배우 이름만 보고 찾아온 관객도 생겼습니다. 영화제작 배급 과정에서 개봉 시점이 얼마나 작품의 수용에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다 보고 나서 초반 장면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구조입니다. 데이나가 일기장을 읽는 장면, 커트가 갑자기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자고 하는 장면, 다들 무언가에 이끌리듯 행동하는 장면들이 처음 볼 때는 그냥 지나쳤는데 다 알고 나면 전혀 다르게 읽힙니다. 그래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몇 안 되는 공포영화였습니다.
결론
크리스 헴스워스 때문에 틀었다가 장르론 강의를 받고 나온 기분이었습니다. 후반부 스케일이 다소 커지는 부분은 조금 어수선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공포영화의 문법을 소재 삼아 이중 구조로 풀어낸 시도 자체는 제가 본 공포영화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했습니다.
공포영화를 꽤 봐오신 분이라면 익숙한 장면들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 알아가는 과정이 특히 재밌을 것 같습니다. 줄거리를 최대한 모른 채로 보는 게 가장 좋고, 다 보고 나서 초반 장면들을 다시 떠올려보시면 영화를 한 번 더 즐길 수 있습니다.